DATE :
13-04-26 18:39
WRITER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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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가 씨름을 잘 하여 수십마리의 황소를 끌어오기도 한 吉吉道 두목은 智略까지 겸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양반이 되지 못하여 자신을 비관한 영특한 사내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설악산 설악동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 절벽의 암석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권금성(權金成)에 숨어 비적질을 하며 울분을 달랬다는 전설이다. 길두목이 이끄는 비적떼들이 권금성을 은거지로 삼아 활약하게 된 시대는 그 훨씬 이후인 조선시대 연산군(1495∼1505)때다.
성이야 언제 누가 어떻게 쌓았든 길두목 일당에게 있어서는 다시없는 훌륭한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당시 동해안, 양양, 속초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하여 꼭 그 길을 지나야만 했기 때문에 권금성은 더욱 비적들의 은거지로 적소였다. 정고평, 마등령, 원통, 인제, 홍천을 거쳐 한양으로 향하였고 또한 이곳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가기 위해 넘나드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암석위 정상에 자리잡은 비적들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계곡 밑의 관도(官道) 옆 주막촌과 은밀한 연락을 취하면 비적질을 했다.
원래가 첩첩산중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지나는 나그네는 꼭 주막촌(현재의 무명 용사비)에 들러 시장기를 채우고 걸죽한 탁주로 컬컬한 목을 축이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멀고 험한 계곡을 넘을 수 가 없었으며,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형편이면 그 주막촌에서 하룻밤을 쉬어야만 넘어 갈 수 있기도 했다. 인접한 곳에 다른 마을이라고 전혀 없었으며 깊은 산골에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주막촌과 긴밀한 연락이 취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비적들로 보아 다시없도록 좋은 조건이었다.
그 주막촌의 주모들 가운데는 남편이 있는 여자 보다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더 많았으며 비적들과 공공연히 정을 통하여 그 마누라 구실을 했는데 이 여자들이 바로 비적들이 소식통이 되어 있었다. 관도를 지나는 손님이 주막에 들어오면 불을 피워 비적에게 그 사실을 알리므로 위로는 마등령, 밑으로는 인제가 바로 비적들의 활동 무대로 되어 있었다. 비적들은 힘이 더 월등한과객을 만나 오히려 당하는 경우는 한번 외에는 거의 없었다. 비적들은 우선 지나가는 과객들을 세워 놓고 수중에 든 돈을 털기도 하고 또 소문날 우려가 있으면 죽여 없애는 것이 상습이었다. 그러면서 보신상 조정의 정보를 입수해 가면서 행패하는 것이 상습으로 되어 있었다.
조정에서 나날이 거센 폭풍이 이는 가운데 강원도 산골의 비적들은 그야말로 호경기를 만났다는 것이다. 길비적 두목은 심복 부하로 떡쇠 외에 많은 졸개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정고부락의 "분" 이와 성대하게 혼인을 하고 3년이 지나다 보니 어느덧 자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 뒤를 이어 20세가 넘었다. 중종 즉위 14년 (1519)에는 己卯士禍가 마침 일어나자 이때 청빈하기로 소문이 난 강원도 관찰사 - 그전에는 양양 도호부 부사를 지낸 - 李光烈은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양양군 서면 갑천리에 초라한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길두목은 이대감의 집 앞에다 고래등같은 80칸 집을 지어 놓고 살다가 어느덧 대감과 인연이 닿게 된 후 많은 것을 배우고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모든 죄상을 뉘우치므로 그 인간성이 완전히 변해 비적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다. 양양군 서면 갑천리 마을 입구에는 부사와 감찰사를 역임한 이광열 대감의 비석이 있었는데 그 산소 옆에 또 하나의 산소가 생겼고 그 비석에 엉뚱하게도 (백장 길길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여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면 용대리 미실령 중턱에 소재하고 있는 도적소도 이 무렵에 도둑들이 미실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소에 빠뜨려 죽게 하였으므로 붙여진 지명으로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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