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3-04-26 18:48
WRITER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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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고려 당나라에 항복을 한 뒤 일이였다.
김부왕 마의태자는 부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천년 사직을 경하게 내 놓을 수 없다 하여 항의 하다가 실패하자 천주의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비빈(妃嬪)과 수십명의 수족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하여 왕도 경주를 떠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남면 김부리까지 와서는 피로한 몸을 쉬기 위하여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계시었다. 이러해서 뒷날 이곳을 김보옥촌 김보동으로 부르다가 김부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수족병 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맹장군이 의병을 초모하여 왕건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김부왕께 고하자 김부왕도 이것을 찬성하여 곧 좌우의 여러 신하들을 여러 고을로 보내어서 의병을 초모해 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지금의 양구 군량리 넓은 벌에서 초모해 온 의병을 일변 훈련을 시키고 한편으로는 그곳에다 군량고를 쌓고 군량미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이 거사를 하기전에 맹장군은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장군을 잃은 수백인의 의병들도 비통한 나머지 가슴을 쳤을 뿐이고 맹장군의 유골을 묻은 뒤로는 산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뒷날 군량고가 있던 곳을 군량리라 하였다고 한다. 남면 김부리에는 당시를 입증하는 대왕당(大王堂)과 애화가 전해 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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