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26 19:19
열녀 전주이씨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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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인제문화원
조회 : 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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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소재지 : 인제군 상남면 상남 3리
ㆍ건립 : 1900년 10월 상순
이 비각은 고종 37년(1900) 10월 상순에 權直相 군수가 당시에 李玉女의 정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정려각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宗鍾彦이 글씨로 된 정려본기가 붙어 있으며 그 원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閔泳統의 처 이씨 나이 열일복에 그 지아비가 죽자 3년상을 치루고 첫 기일에 음식을 끊고 마침내 남편의 뒤를 따라 죽으니 조정에서 그 정절을 嘉尙하여 열녀 정려각을 그 마을에 세우도록 하니 士人 金容圭라는 선비가 내게 그 기문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해와 九三返祭에 이글을 지었으니 가로되 여자로서 그 남편에게 정열함은 마치 신하가 임금에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함과 같아서 곧 그 본분을 다함이니 소위 열녀라 할 정도로 그 본분을 다하는 자가 어찌 쉽게 있으리오.
옛날에 衛의 共妻는 그 지아비가 죽으니 따라갔고, 또 달리 魏의 夏候令의 딸은 지아비 曺가 죽으니 머리털을 잘라서 다시 改嫁하지 않겠다는 신표를 상았으니 이러한 일이 時로 읊어서 전파되고 역사의 기록에 올라서 백대에 두드러진 드문 정절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 죽음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바르게 일깨우고 거듭 밝히어 널리 본을 보임이니 이런 연유로 충신이나 효자에게 정각을 세우게 하듯이 열녀에게도 정려각을 세우도록 함이 모두 같은 이치이다. 사대부로서 예절을 지키기로 집안에서라면 이미 어릴 때부터 이런 행실에 관해 더러 귀로 듣기도하고 눈으로 보기도 해서 몸에 익히기도 할 것이니 놀라운 일로 일컬을 것이 아니라고도 하겠지만이제 이 이씨로 말하면 시골에서 자라서 선비에게 시집가 서울로 떠나갔으니 아주 깊은 산골에 살며 나이도 어렸으니 어찌 귀로 듣고 눈으로 본바 있어 이렇게 함이랴.
이는 곧 그 타고난 천성이 그 큰 근본을 잘지켜 왔음이니 시부모를 성심껏 모시엇고 공경하여 남편을 섬겨서 아뒤 모든 처사가 그 근원에서 같이 만나니 이는 천성이 그러함이지 억지로 꾸며하지 못하는 일이다. 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크게 거리는 바이니 이씨는 어찌 그것을 준별해 알지 못하였을 것이랴. 그 본시는 조정에서 표창되기를 바라서 함이 었던 것도 아니요, 도한 그 고을이나 마을에서 칭송을 듣고자 한 죽음도 아니다. 다만 여자로서 배운 바가 정절을 지키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만약 이 마음을 그대로 옮겨 임금을 섬기면 곧 충성이 되고, 부모를 섬기면 효도가 되는 것이다.
조정에서 이씨 부인을 위해 정려각을 세우게 하였고 이미 정녀를 세워 그 정절을 현찬한 뒤에 가히 훌륭한 사회 기풍을 세워 오늘에 칭송함이 있게 되었으니 鳴평 世上의 무릇 모든 군자들은 이 정녀각을 보고 몸소 본받도록 할 것이다. 庚子年(陰曆) 10월 上旬 宗鍾彦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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