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26 19:20
열녀 평창이씨 효열비와 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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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인제문화원
조회 : 3,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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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소재지 : 인제군 기린면 북 3리(궁동 뒷산)
ㆍ건립 : 1943년 3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70년경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평창 이씨 효자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열녀 평창 이씨는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예의가 바르며 부모와 이웃 어른에게 지극한 효심과친절을 다하며 엄격한 가정 교육으로 자라났다.
그 후 성장하여 부모 곁을 떠나 강원도 횡성 장씨 가문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세 전으로 추정되며, 어떠한 중매와 연고로 횡성 땅 장씨 가문으로 출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媤家 장씨 가문의 세족 내력을 보면 媤父는 인동 장씨로 경주판관을 지낸 장순원 씨이고,媤母는 성주 이씨이며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이 익상 씨, 둘째 아들이 덕선 씨, 셋째 아들이 기상 씨, 넷째 아들이 창섭 씨이다.
열녀 평창 이씨는 장씨 가문 둘째 아들 德善 씨를 남편으로 맞아 시집을 가서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시부와 남편이 나쁜 전염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나름대로 한방을 찾고 수소문하여 높고 낮은 산을 헤메며 좋다는 약초는 캐로 뜯어다가 탕을 재워 간호를 하였지만 효력없이 남편을 잃게 되었고 또한 시부를 잃게 되었다.
이 때 자기 손가락을 잘라(단지)운명 직전의 시부 입에다 피를 넣어드려 3일을 더 회생하였다가 운명하였다는 점이 중요한 효심이다. 이 사실은 표상 내용과 사위가 세워 놓은 효열비문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예법을 준수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 3년상, 남편 3편상, 도합 6년상을 지냈다고 역시 표상 내용에 나타나 있다. 표상은 1922년 임술(壬戌)8월에 유림 계통인 공부자 성적도 「오륜행실중간소(孔夫子 聖蹟圖五輪行實重刊所)」에서 그의 지극한 효성을 뒤늦게 알고 포상을 전달하였으며, 1943년 癸未3월에는 이승호 씨가 묘소 옆에다 효열비를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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