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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문화원  문화와역사  문화재

 
작성일 : 13-04-26 19:29
마의태자 유적지비
 글쓴이 : 인제문화원
조회 : 4,163  
ㆍ소재지 : 인제군 남면 신풍리
ㆍ건립 : 1987년 10월 31일
 

마의태자 후손 부안 김씨 대종회에서 87년도에 건립한 유적지비로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길을 바꿔 동쪽으로 약 40리 쯤가면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 마의태자 신전대왕각(神殿大王閣)에 이른다. 성이 김(金), 휘가 일(鎰), 자가 겸용(謙用)인 태자는 신라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竹房王后) 朴氏사이에서 왕의 9남 3녀중첫째 왕자로 917년에 태어났다.
927년 공의 아버지 김부가 신라 56대 왕이 되자 공도 태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시중 김유렴의 딸 김영란을 태자비로 맞았다. 경순대왕 9년에 이르러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에 눌러 국력이 쇠약해지자 왕은 나라를 고려에 양국하려 하였다.
이때 태자가 나서서 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느냐고 반대했으나 왕의 뜻대로 나라는 왕건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태자는 어머니 죽방왕후를 모시고 자신을 따르는 충신 열사들과 처자를 거느리고 개골산에 들어가 망군대와 한계산성을 쌓고 조국 신라의 광복 투쟁에 전념하였다. 신라 유민들에 의해 대왕으로 추대된 태자는 나라가 망한 것을 자책하고 조국광복의 결의를 굳게 하기 위하여 삼베옷을 많이 입었으므로 마의태자 또는 마의대왕이라 하였다.
항려 유적지 한계산성, 갑둔의 5층 석탑, 김부리의 옥새바위, 대왕각, 대왕정, 술구미재, 다물 장병총등이 지금까지 남아 공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태자가 승하하시자 유민들은 신전대왕각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5월5일과 9월9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년이나 계속됐다.
공은 태자비 김비와의 사이에 네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은 기로(箕輅) 둘째는 교(較) 셋째와 넷째는 출가하여 보림대사와 보현대사라 하였다. 태자가 승하하자 큰아들 기로공(箕輅公)은 정원대사(正元大師)의 법명(法名)으로 부안 벽산 울금 바위에 찾아가 신라를 부흥시켜 줄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며 부령땅에 뿌리를 내리니 그 자손들은 마의태자를 시조로 모시고 부령(扶寧) 김씨(金氏)를 창씨(創氏)하여 대성(大姓)으로 번창했다.
곧 춘은 부령부원군 구(坵)는 고려 평창사(平章事)가 되었다. 둘째아들 교(較)는 통천(通川)김씨(金氏)시조 작신(作辛)은 부여(扶餘)김씨(金氏)시조가 되었다. 공의 자주 독립정신은 후예들에게 이어져 이들이 고구려의 옛땅 만주 대륙을 되찾는 운동으로 승화시켜 나갈 것이다.
扶寧 후예 種元 삼사 씀 측면에는 扶安金氏始祖麻衣太子金鎰 後裔 金燦浩 立碑 건립추진 扶安 金氏 大宗會 단기 4320년 10월 31일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