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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 만해한용운


  • 출생지 / 충남 홍성
    독립운동가·승려·시인
    * 본관 청주(淸州)
    * 호 만해(萬海·卍海)
    * 속명 유천(裕天)
    * 자 정옥(貞玉)
    * 계명 봉완(奉玩)
  •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1905년(광무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 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 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 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 (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 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 (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 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 1879(1세) : 8월 29일(음력 7월 12일)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 사이의 2남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 본관은 청주, 어린시절의 이름은 유천, 호적이름은 정옥.
  • 1884(6세) : 향리 서당에서 한학 수학.
  • 1886(8세) : 홍성읍내로 이주, 한학 공부 지속.
  • 1887(9세) : 통감, 대학, 서상기, 서경 등을 공부.
  • 1892(14세) : 전정숙과 결혼.
  • 1896(18세) : 향리의 서당 선생, 새로운 도전을 위해 가출. 보은의 속리사로 입산.
  • 1897(19세) : 월정사 강원에서 수학.
  • 1898(20세) : 설악산 백담사로 이전, 사미계 수계(법명, 奉玩).
  • 1903(25세) : 세계일주를 위한 시베리아행 도전, 귀국 석왕사 칩거, 참선.
  • 1904(26세) : 일본행 계획, 실패. 홍성으로 귀향, 홍성 재 가출. 아들인 전보국 출생.
  • 1905(27세) : 1월 26일 백담사 재입산, 비구계 수계(은사 김연곡으로, 계사는 전영제)4월, 이학암(백담사)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을 배움.
  • 1907(29세) : 건봉사에서 최초의 안거 수행 만화선사로부터 전법(당호, 龍雲).
  • 1908(30세) : 4월 유점사에서 서월하에게 화엄경 배움. 5~10월 일본으로 시찰 겸 유학(임제종대학). 10월 귀국, 건봉사에서 이학암에게 화엄경과 반야경 배움. 12월 10일 경성명진측량강습소 개설, 소장.
  • 1909(31세) : 7월 30일 표훈사 강원 강사.
  • 1910(32세) : 3월, 9월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달라는 건백서 제출. 9월 20일, 화장사 화산강숙 강사. 12월 8일,「조선불교유신론」탈고.
  • 1911(33세) :원종의 조동종 맹약에 반대하는 임제종운동 주도. 임제종 종무원의 서무부장 겸 관장 서리, 3월 16일 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 종무원을 범어사로 이전.10월 만주지방 순행.
  • 1912(34세) :5월 임제종중앙포교당 개설 6월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일제 외압으로 선종중앙포교당으로 명칭 변경. 8월 불교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 결성, 좌절. 통도사에 머무르며 대장경 열람.
  • 1913(35세) : 3~4월 「 조선불교월보」에 <승려의 단결>(「 조선불교유신론」일부 원고) 기고. 이 때에 처음으로 필명, 자호인 萬海를 사용. 5월 19일 통도사 강원 강사에 취임.
  • 1914(36세) : 4월 조선불교강구회 총재. 4월 30일「 불교대전」을 간행(범어사를 발행처로).
  • 1915(37세) : 5월 19일 조선선종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
  • 1917(39세) : 4월 4일 신문관에서 「정선강의 채근담」발간 12월 3일 오세암에서 좌선중 깨달음.
  • 1918(40세) : 9월 월간 교양잡지「유심」을 발간, 발행인(3호로 중단)
  • 1919(41세) : 1월 최린 등 천도교측과 3·1운동 논의.2월 불교, 유교측의 민족대표 포섭. 공약삼장 추가. 3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참여, 주도. 일제에 피체. 7월 10일 <조선독립 이유서> 작성.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
  • 1921(43세) : 12월 22일 석방, 선학원에 머무름
  • 1922(44세) : 3월 24일 역경과 불교대중화를 위한 단체인 법보회 발기. 3월 29~30일 선학원의 선우공제회 발기인. 11월 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
  • 1923(45세) : 3월 31일 민립대학기성회의 중앙부 집행위원에 피선, 4월 2일 상무집행위원에 피선.
  • 1924(46세) :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
  • 1925(47세) : 6월 7일 오세암에서「십현담주해」탈고. 8월 29일「님의침묵」탈고.
  • 1926(48세) : 5월 15일 법보회에서「십현담주해」발간(비매품, 법보시)5월 20일 회동서관에서「님의 침묵」발간.. 6월 7일 선학원에서 6·10만세운동 예비검속으로 구속.
  • 1927(49세) :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2월 15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 6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피선.
  • 1928(50세) : 8월「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약지」편찬, 발간.
  • 1929(51세) : 12월 광주학생운동의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
  • 1930(52세) : 5월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당수로 추대(비공식). 서울 종로의 사직동에 칩거.
  • 1931(53세) : 6월「불교」의 발간처인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 7월 전주 안심사의 한글경판 발견, 확인.
  • 1932(54세) : 12월 안심사(전주)에 보관되었던 한글경판을 인출. 「불교」지 선정 불교계 대표인물 선정에서 절대 다수로 1위 차지.
  • 1933(55세) : 7월「불교」휴간으로 불교사 사장에서 퇴직. 유숙원과 결혼(재혼).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머무름.
  • 1934(56세) : 9월 딸 한영숙 출생.
  • 1935(57세) : 4월 9일,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 연재 시작(1936년 2월 4일까지).
  • 1936(58세) :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 연재(50회로 중단). 신채호 묘비 건립(비용은 조선일보의 원고료로 충당, 글씨는 오세창이 씀). 7월 16일, 다산 정약용서거 백년기념회 개최(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 1937(59세): 3월 만주의 항일운동가 김동삼이 서거하자, 유해 인수하여 장례를 치룸. 「불교」신1~2집에 소설, <철혈미인> 연재.
  • 1939(61세) : 청량사에서 회갑연 개최(음력 7월 12일). 다솔사에서 회갑 기념식수. 조선일보에 삼국지를 번역, 연재 시작(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시까지).
  • 1942(64세) : 신채호 유고집 발간 추진, 좌절(최범술, 박광, 신백우와 함께).
  • 1944(66세) :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 미아리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그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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